*검단동(檢丹洞)
처음에는 금단동(琴壇洞) 이었는데 일본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 와서 행정을 장악하면서 검단동(檢丹洞)으로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바꿔 부른 이유는 일본 사람들이 발음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이며 이때부터 검단동으로 계속 불리어 왔다
*고성동(古城洞)
조선시대에 지금의 대구역에서 오봉로 사이에 옛 성터가 있었다 한다. 그 성의 서문은 현 동산 파출소 부근에 있었고. 북문은 칠성시장 부근에 있었는데, 그 성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지금의 달성공원과 이어져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옛날 사형장으로 사용하였다는 칠성바위 (현 시민운동장에 위치) 주변을 지나는 성 안쪽에는 개울이 흘러 자갈마당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이 일대의 행정구역명을 금정(錦町)이라 불렀으나 해방 후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동이름을 바꾸어야 하겠기에 옛 성이 있던 자리에 위치하였다 하여 고성동(古城洞)이라 불렀을 것이라 전하고 있다.
*구암동(鳩巖洞)
구암동(鳩巖洞)은 함지산을 중심으로 근처의 비로실, 운암동, 웃기명, 아랫기명, 미륵골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는데, 해방전까지만 해도 함지산 부근 숲속에는 여러가지 열매가 풍부해 많은 비둘기떼들이 모여들어 주위에 있는 바위들을 하얗게 만들었다 한다. 구암동(鳩巖洞)이란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될 것이며, 그 후 1981년 7월 1일 행정구역 변경시 대구직할시에 편입되었다.
또.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삼국시대부터 불려 내려온 "비로실(飛鷺室)"이라늘 이름은 이 마을 뒷산 모양이 해오라기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형상이어서 "날비(飛)" 해오라기로(鷺)" 집실(室)" 자를 써서 비로실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그 후 비로실이라는 자연 지역명은 이 지역 주민에 의해 꾸준히 사용되어 오다가 일제시대에 구암동으로 바뀐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비로실이라는 이름을 그 어느 동명보다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칠곡 1동에 해당되는 구암동은 통일신라 때 (경덕왕)에 팔거리현에 속해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와서 처음 이 동명(洞名)으로 불리어졌다.
*노곡동(魯谷洞)
노곡동은 대구의 진산(鎭山)인 팔공산이 뻗어내려 남으로 대덕봉을 이루고, 그 앞으로 금호강의 청강을 이루며, 현 경부고속도로가 앞을 지나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아담한 마을이다.
임진왜란도 피한 천연 요새지로, 경주 이씨가 100여 가구, 김녕 김씨가 160여 가구 집단을 이루고 있는 집성촌이다.
옛날에는 대구 10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절경이었으나, 60년대 제3공업단지의 입주와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주택이 50여 가구가 헐리는 등 자연경관이 크게 훼손되었으며, 이곳에 있던 노곡초등학교도 바로 이때 삼영초등학교로 옮겨갔다.
대구십경중에 제8경 : 櫓院送客(노원송객, 노원에서의 송별)
官道年年柳色靑(관도년년류색청) 한양길 버들잎은 해마다 푸르고
短亭無數接長亭(단정무수접장정) 줄이은 주막들이 길게도 늘어섰네
唱盡陽關各分散(창진양관각분산) 이별의 노래 그치고 흩어진 뒤에는
沙頭只臥雙白據(사두지와쌍백거) 빈 술병만 짝이 되어 모래맡에 딩구네
短亭長亭(단정장정) : 작은숙사와 큰 숙사 옛날에 五里마다 단정을, 십리마다 장정을 두었음.
陽關(양관) : 중국의 關門名(관문명)으로 지금의 甘肅省(감숙성) 敦煌縣(돈황현)에 있고 옥王維(왕유)의 渭城曲(위성곡)으로 有名하며 送別(송별)의 뜻을 나타냄.
櫓院(노원)은 大櫓院의 약칭인데 당시 大邱의 북쪽 關門(관문)인 이곳 大櫓院에서 惜別(석별)의 情을 노래한 것이다. 원래 도로 연변에 행인들이 쉬어가게 해 놓은 곳을 院(원) 또는 定구(정)이라 하는데 거리가 먼 곳을 長亭(장정), 가까운 것을 短亭(단정)이라 했고 이곳이 대구서 한양가는 길목의 첫 나루터여서 길손들이 쉬어감은 물론 이별과 만남의 哀歡(애환)이 교차되던 곳이다.
이 大櫓院 앞이 八達津(팔달진, 팔달교가 놓이기 전의 금호강 나루)이어서 犬郎(견랑)의 關門(관문)이 그리로 바뀌었다.
삼면이 산을 두르고, 마을 앞을 지나는 금호강은 400여년의 마을 역사 속에 숱한 전란과 돌림병을 막았던 곳이기도 한다.
이 마을 집성조 경주 이씨는 400여년전 (경주에서 3형제 중 한분인 이 후보씨가)임진왜란을 피하기 위하여 이 곳에 자리잡게 되었으며, 김녕김씨 입향조는 김문기 선생의 7세손 귀송공이 사육신 사건후 경북 상주로 귀양 갔다가, 임란을 피해 천연요새인 이 곳에 400여년전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이 마을을 노실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마을 뒷편에 도덕봉이 있고, 옛터만 남아있는 관니산성의 "니"자가 공자의 호 중니(仲尼)에서 따온 것이라 하며, 노곡의 노자도 공자가 살던 노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라 한다.
*노원동(魯院洞)
노원동은 대구부 서구 원대동이었으나 1975년 10월 1일 인대 2가 일부와 원대 4가를 노원 1가로. 원대 5가를 노원 2가로 개칭, 노원 1 , 2가동으로 명명되었다. 이곳은 원래 원대들로서 노곡동(魯谷洞) 주민들의 농토로 이용되어 왔으나 취락이 형성된 후 원대동(院垈洞)으로 명명되었다.
그 후 1975 10. 1 행정구역 개편으로 서구에서 북구로 편입되면서 주민들의 의견에 따라 노곡동의 첫자와 원대동의 첫자를 따서 노원동이라 했다 한다.
*태전동(太田洞)과 매천동(梅川洞)
태전동(太田洞)은 일제시대에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지당, 수평, 큰 이매, 작은 이매의 자연 부락을 합치고, 또 태복산 밑에 있는 많은 콩밭을 포함하여 지어진 마을 이름이다 태복산은 太(태)자 모양인 산맥으로 이 마을의 북서쪽에 있는 높은 산이다.
이때 매남, 못안, 장태실을 합쳐서는 매천동이라 불렀는데 본디 매남은 유교 학문상으로 온화하고 따뜻한 마을이라는 뜻이고 매천동이란 매남과 팥계천의 철자와 끝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복현동(伏賢洞)
동쪽은 금호강, 서쪽은 배자못을 사이에 산격동, 남쪽은 신암동, 북쪽은 검단동에 접하고 있는 복현동은 1600년경 대구부 동중면 보선암(寶仙岩), 일명 보선바우라 하였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달성군(達成郡) 성북면(城北面)에, 1938년 대구부 구역 확장에 의하여 대구부에 편입되었으며 1981년 대구직할시 승격에 따라 대구직할시 북구 복현동(伏賢洞)으로 개칭되었다.
복현동(伏賢洞) 60번지 외 94-2, 94-1번지 야산 17700평에 경주 이씨 (慶州 李氏) 논복공(論福公) 문중의 가족 공동 묘지가 있었는데 이 묘지(墓地)는 7대조 무실공(茂實公) 가선대부(嘉善大夫) 영조(英祖) 무신(戊申, 1728年) 분무일등공신(奮武一等功臣)이되었을 때 왕 영조(英祖)께서 하사하신 땅으로 업드려(伏) 현모(賢)한다는 뜻으로 지명을 복현(伏賢洞)으로 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 묘지는 도시화에 밀려 북구 동변동 33번지 일대 야산으로 옮겨졌다.
보선(寶仙) 바우라는 명칭은 야산에 넓은 바위가 있었는데 선녀가 내려와 놀다가 하늘로 올라갈 때 보물을 빠뜨리고 갔다 해서 보선 암이라 칭하였다는 구전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 명칭은 복현이라는 명칭을 얻기 전에 사용된 지명으로 보인다.
*산격동(山格洞)
1914. 3. 1 행정구역의 통폐합에 따라 산격동(山格洞)으로 바뀌어 달성군 성북면에 편입되었으며 1938 . 10. 1 다시 대구부로 복귀하였다가 1949. 8. 15 대구시에 편입되어 다시 행정구역 변경으로 1987. 7. 1 . 대구직할시 북구 산격 1 동으로 명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구부의 동중면 지역으로 뒷산이 매의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옛날에는 "미지리"라는 우리말로 불리어 졌다.
"미지리"는 "메잠"이며 "메잠"은 산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는데 행정구역 개편으로 한문으로 지으니 산격(山格)이라 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이곳 연암산이 우뚝 솟아 아래로 절벽이 끊어지면서 앞에 금호강과 넓은 평야가 펼쳐져 연암산이 사이를 가로 막는 간격이 벌어져 있다 하여 산격(山格)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산격동은 금호강과 신천을 접한 하상취락 마을로 옛날 이곳은 서당골을 중심으로 여흥 민씨가 터전을 잡고 거주하고 있었으나 달성 서씨가 이곳에 정주하면서 점차 달성 서씨의 마을로 변하였다.
*신기동(新基洞)
옛날 후삼국시대에 왕건과 견훤이 팔공산 부근에서 큰 싸움을 벌렸는데 싸움에 패한 왕건이 급히 도망을 가던 중 이곳에서 처음 길을 찾았다 하여 "구도(求道)골"로 불리었다 한다.
이곳은 무덤이 많고 3년 시묘살이하는 이가 많아 "시묘골"로 불리어지기도 했다. 그 외 이곳에는 불뫼절이 있어서 큰 웅덩이가 두 곳 있었다고 한다. 불뫼는 대장간을 의미하므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길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암산(燕岩山) 근처에 살던 서씨들의 외척인 민씨들이 가세가 기울어지게 되자 원래 있던 곳에서 굴뚝 뒷 방향인 이곳으로 와서 살게 되었다 하여 "굴뚝골"고도 불렀다 한다. 그 후 민씨와 서씨들이 점점 모여플어 새로운 동네가 형성되자 새로 터를 잡은 동네라 해서 "신기동" 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이곳에 달성 서씨의 7대조 무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약 200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도 서씨와 민씨가 많이 살고 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씨들의 제실이 있었으나 명보 수정아파트 건설로 없어지고 말았다.
신기동은 1981년 7월 1일 대구직할시 승격에 따라 산격 2동으로 동명이 바뀌었다.
*칠성동(七星洞)
칠성동의 동명은 칠성 바위에서 유래된 것 같다.
현재 태평로. 2가 1번지 시민회관 앞에 놓여있는 칠성 바위는 지석묘로 이것은 옛 공회당 서남쪽 소나무 숲 속에 있던 것이나 1973년 대구시가 공회당을 헐고 시민회관을 지을때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지석묘는 탱석 또는 고인돌이라 부르는 선사시대 무덤으로 한반도 거의 전역에 분포되어 있다. 대구의 지석묘는 그 분포상황을 볼 때 단순한 무덤으로서의 가치뿐 만 아니라 선사시대 취락 집단이 생활권 확보를 위해 진출하는 과정에서 각기 집단의 존재를 나타냄과 동시에 커다란 바위를 세워 생활권 구역을 명확히 표시하는 상징적 기념물로도 삼았던 것 같다.
칠성바위는 이같은 지석묘 중의 하나였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기를 낳지 못하는 사람이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아기를 낳는다는 민간 신앙의 대상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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