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요호 사건은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적으로 조선 영해에 침입해 온 사건이다. 일본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운 뒤,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운요호를 보내어 강화도 부근까지 침입시키었다. 이를 발견한 초지진 포대에서 먼저 공격을 가하자 그들은 즉각 포격을 해 오더니, 영종도에 상륙하여 살인, 방화, 약탈을 마음대로 하였다. 우리의 수비 부대는 거대한 함포를 비룻한 발달된 무기를 갖춘 이들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영종도에 상륙한 일본군은 곧 물러갔으나, 이를 빌미로 하여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을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한다. [[이 부분이 태극기가 탄생하게 된 배경입니다]] 운요호 사건 당시 운요호의 게양된 일본국기가 초지진 포대의 공격으로 불타버렸는데 이것을 가지고 일본의 국기를 게양했는데도 불구하고 먼저 공격한 사실에 대해서 속시원히 해명하라는 일본의 압박이 강화도 조약 당시 한몫을 했다. 우리 나라의 난처한 입장을 눈치챈 중국은 먼저 황준헌을 통하여「중국의 국기(龍旗)를 본받아 그려서 전국적으로 사용하라는 간섭을 하였다. 그 후 우리 나라와 중국은 국기 제정에 따른 양국 위원을 임명하였는데 우리측 위원은 이응준이었고, 중국측 위원은 마건충이었다. 하지만 국기 제정은 흐지부지해져갔다. 그 당시 국기 제정을 하는데 중국측 위원의 망언과 간섭은 역시 자주 독립국가인 우리나라에 대한 모독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참지못한 고종 황제는 직접 나서서 국기를 제정한것이다. 국기 제정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박영효를 대표로 한 수신사 일행을 일본에 파견하게 되었고, 이때 박영효는 출발에 앞서 고종황제로부터 국기 제작에 대한 내략을 받았다.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동승한 수신사 일행, 영국 영사관 아스톤(W.G Aston), 선장 제임스(James) 등과 태극 8괘의 도안을 가지고 숙의한 끝에 최종적으로 4괘의 태극기를 국기로 결정 제작하였다. 이 태극기는 고베에 도착하였을 때 숙소 니시무라야(西村屋)의 옥상에 게양하였으며 이 사실을 기무처로 보고하였다. 관련 사이트는 http://warlock.hihome.com/Taeguk/story.htm에 들어가서 참조 바람. |
내용출처 : http://donghan1004.hihome.com/linkbox/munhwa/taekekgi/taekekgi_ysa.h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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